
2013년 첫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원룸얻을 보증금이 없어 회사 근처 한 아주머니가 강아지를 데리고 사는 빌라 방 한칸을 빌린 적이 있다. 내가 화장실을 오가거나 빨래를 돌리러 가거나 외출할 때마다 사납게 짖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그렇게 서러웠었다. 주인아주머니는 돈을 벌고, 강아지는 떽떽거리며 집주인 행세를 하고. 강아지 짖는 소리가 참기 힘들어 주인아주머니께 나간다고 했더니 (자세한 피해 금액은 오래 전이라 확실하지 않지만) 100만원 정도 되는 보증금을 돌려주지 않아서 찬 방에 누워 서럽게 울었던 기억이 난다.
그 후, 회사에서 나오는 무이자대출 3000만원을 받아 회사 근처 단독주택을 개조한 원룸에 살았다. 카톨릭 신자인 집주인은 주말마다 자주 손님을 초대했다. 집 근처에 큰 성당이 있었다. 어느 봄날의 주말, 호기심에 예배에 갔다가 나눠주는 밀가루 떡을 먹지 않았다는 이유로 대차게 쫓겨났다. 여기에서 사는 동안 회사 동기의 소개팅을 통해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화장실 하나 딸린 조그마한 원룸에서 우리는 피자를 포장 해와서 먹고, 닭갈비를 먹으러 가고, 다운로드 받은 영화를 보며 꽁냥꽁냥 토끼굴 데이트를 즐겼다. 서로의 일상으로 돌아가야 하는 일요일 저녁, 3층 창 밖으로 멀어지는 남편의 모습을 보며 다가오는 월요일을 실감하곤 했다.
결혼을 위해 계약 만료일보다 두어달 이르게 방을 빼야했을 때 카톨릭신자 아주머니는 다음 사람을 구해놓고 나가지 않으면 보증금을 돌려주지 않겠다고 했다. 네이버의 유명한 ‘피터팬의 좋은집 구하기’라는 카페에 열심히 글도 올리고, 사진도 찍어올려 몇 달 후 주인이 원하는 여성 세입자를 구해주었다. 이 때 알았다. 세상에 ‘상생 집주인’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돈이 없으면 그런 현실을 매일 뼈저리게 체감해야 한다는 것.
결혼 후 우리의 첫 집은, 분당의 작은 주공아파트(17평)였다. 이 때는 서로를 너무 모르기도 했고, 나도 철이 없어서 남편과 많이 다투었다. 낡은 복도식 아파트의 화장실이 마음에 들지 않아 남편에게 화장실만 조금 수리해서 쓰자라고 얘기했는데 남편은 남의 집에 100만원도 쓰기 아깝다며 반대했다. 이 때 서러웠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히 남아있는데, 그 다음 집에 또 전세를 갔다. 집 살 돈도 부족하긴 했던 것 같은데, 이때까지는 남편과 나는 부동산에 대해 좀 회의적이었던 것 같다. 가계약을 파기하자는 집 주인=부동산 중개사와 한 판 실랑이를 하고, 2년을 살았다. 계약이 끝날 즈음 나는 무조건 집을 사야겠다고 생각했다. 임신 중 3~4개월 정도 전화와 발품을 열심히 팔았다. 부동산에 대해서는 잘 몰랐기 때문에 나의 원칙은 두가지 뿐이었다. 첫번 째, 오를 집은 모르겠으니, 떨어지지 않을 좋은 위치에 집을 사자, 두 번째, 집 값이 어떻게 되었든 평생 살아도 괜찮을만한 집을 고르자.
왜 집을 왜 사냐는 시어머님과 남편에게 나는 세는 서러워서 더 이상 못 살겠다고 강하게 어필하여 용인의 50평 역세권 아파트를 샀다. 이때만해도 부동산 가격은 떨어질거라는 의견이 우세해서 매물이 올라오더라도 바로 나가지 않았을 뿐더러 내가 산 아파트는 평수도 커서 선뜻 구매하려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나는 이 집을 처음 보았을 때부터 앞 동 없는 ‘뻥뷰’에 한 눈에 반해버렸다. 이 전 집은 앞 동이 보여서 해도 잘 들어오지 않았던지라 집 값과 상관없이 평생 살 집은 하루 종일 집에 있어도 답답하지 않은 트인 베란다를 갖고 싶었다. 심지어 운 좋게도 집주인은 이미 이사를 가고 비어있는 집이라, 인테리어 공사도 여유를 가지고 할 수 있었다.
이 집을 매매할 때 가장 큰 고민은 평수가 너무 넓다는 것이었는데, 코로나 시기에는 이 점이 최고의 장점이 되었다. 코로나 시기에 이모님 대신 어머님이 아이를 봐주시면서, 방 하나를 어머님 방으로 드릴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주변 지인들에게 시어머님과 함께 몇 년을 살았다고 얘기하면 “어머.. 어떻게 시어머님이랑 그렇게 오래 살았어요?” 진심으로 우려하는 목소리였지만, 낮시간 동안 어머님은 주로 어머님 방에, 나는 재택근무를 위해 컴퓨터 방에 머무르고 화장실도 아예 나눠서 사용했기 때문에 생각보다 서로의 프라이버시(?)를 존중하며 지낼 수 있었다.